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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영화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사랑받는 대상’, ‘희생하는 어머니’, ‘범죄 피해자’ 등으로 주변화된 인물이었습니다. 주인공이라 해도 서사를 능동적으로 이끄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남성 캐릭터의 감정선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 소비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여성 캐릭터는 점차 서사의 중심, 즉 이야기의 주체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스크린에 ‘여성’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 그 여성의 욕망, 분노, 선택, 성장이 영화의 핵심으로 작용하는 시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 여성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서사 주체’로 기능하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일까요? 이 글에서는 시대 흐름, 대표 작품, 산업 환경의 변화를 중심으로 그 시작과 전개를 정리해보겠습니다.

    김복남살인사건의 전말 포스터

    1. 여성의 주변인 시절: 1980년대 이전

    1980년대 이전 한국영화에서 여성은 대부분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기능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가족 영화’, ‘멜로 드라마’, ‘시집살이형 사극’ 속 여성은 모성, 희생, 순종이라는 코드로 표상되었죠.

    영화 ‘춘향전’이나 ‘별들의 고향’ 같은 작품을 보면, 여성은 사랑받지만 선택권이 없으며, 감정적으로는 풍부하지만 결국 남성 중심 이야기의 부속품으로 작동합니다. 또한 이 시기 여성은 종종 유흥업소 종사자, 술집 여인, 치명적 팜므파탈로 등장해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도구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1980년대 이전까지 여성 캐릭터는 ‘출연 비중’이 아닌 ‘서사 주체성’ 측면에서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서사 전환의 신호: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

    여성 캐릭터가 서사 주체로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이 시기는 한국영화가 본격적인 산업화에 진입하며 장르 다양화와 감독 세대 교체가 이뤄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작품은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이 영화는 당대 여성들의 성과 연애, 직장생활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며 여성 캐릭터들을 단순화하지 않고 복합적 인격체로 그렸습니다.

    이후 ‘미술관 옆 동물원’(1998),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등에서 여성은 점점 ‘정서의 중심’이 되어갔고, ‘박하사탕’(1999) 같은 남성 서사 중심 영화에서도 여성의 시선이 서서히 삽입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도 대중적으로 완전히 여성 중심 서사가 주류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사적으로 분명 전환의 조짐은 있었지만, 시장 안착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3. 여성 서사의 확장: 2005년 이후, 본격화된 변화

    한국영화에서 여성 주인공이 명확하게 ‘서사 주체’로 자리잡은 시점은 2005년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친절한 금자씨’(2005, 박찬욱)는 그 상징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이영애가 연기한 금자는 단순한 피해자도 아니고, 연인의 뒷배도 아닌 자신의 서사와 복수를 스스로 이끌어가는 주체적 캐릭터입니다. 관객은 그녀의 심리, 변화, 결정 과정을 따라가며 완전한 ‘여성 중심 서사’에 몰입하게 되죠.

    이후 한국영화계에는 여성 주연, 여성 심리, 여성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영화들이 등장합니다:

    • ‘미쓰 홍당무’(2008): 사회 부적응 여성의 내면 풍경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여성 억압과 분노의 폭발
    • ‘도가니’(2011), ‘한공주’(2013): 피해자의 시점에서 사건을 재구성
    • ‘82년생 김지영’(2019): 일상 속 성차별의 고발

    이 시기의 여성 영화는 단순한 ‘여성 캐릭터’가 아닌, 여성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맺는 서사 중심으로 옮겨간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4. 산업과 관객의 변화: 여성 서사를 키운 동력들

    여성 주체 영화가 늘어난 것은 단지 감독의 선택만이 아닙니다. 여성 관객의 증가, 여성 창작자의 확장, 젠더 감수성의 변화가 맞물린 결과입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30대 여성 관객이 한국영화의 주요 타깃이 되었고, 그에 따라 ‘그들만의 이야기’가 필요해졌습니다. 또한 이수진(‘한공주’), 김도영(‘82년생 김지영’), 정가영(‘너와 극장에서’) 등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그 시선은 더욱 섬세하고 일관된 서사로 구현됩니다.

    또한 넷플릭스와 같은 OTT의 확장은 ‘여성 중심 드라마’의 확산에 기여했고, 영화 역시 그 영향을 받아 다양한 여성 주연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환경을 형성했습니다.

    결론: 한국영화의 여성 주체 서사는 이제 시작일 뿐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오랫동안 조연, 보조적 역할, 감정의 트리거로만 존재했지만, 1990년대 말 전환기를 지나,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주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여성 서사의 양적·질적 확장은 더 이상 특정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스릴러, 드라마, 코미디, 판타지, 심지어 액션까지도 여성 주인공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영화가 어떤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보여줄지, 그리고 그들이 또 어떤 방식으로 서사를 주도해갈지 지금은 변화의 출발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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