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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극적인 콘텐츠가 일상이 된 시대입니다. 슬래셔, 고어, 범죄 미스터리, 심리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의 자극적인 영화와 시리즈가 넘쳐나고, 왠만한 장면에도 놀라지 않는 관객이 점점 늘어나고 있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이건 좀...”이라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2008년 프랑스산 호러 영화 ‘마터스(Martyrs)’입니다. 단순한 고어, 단순한 스릴러가 아닌, 육체와 정신,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잔혹한 체험. 이 글에서는 왜 자극에 내성이 생긴 관객에게도 ‘마터스’가 충격을 주는지, 그리고 그 충격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깊이 있게 다루어보려 합니다.

    마터스 포스터


    마터스의 시작: 고통과 복수,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마터스’는 루시라는 한 소녀가 어딘가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하다 탈출하면서 시작합니다. 이미 이 설정부터 불쾌함이 느껴지지만, 영화는 이 장면을 비교적 짧게 보여준 후 15년이 흐른 시점으로 전환합니다. 이후 루시는 자신을 고문했던 가정을 찾아가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그녀의 유일한 친구 안나가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영화의 중심축이 이동하게 됩니다.

    관객은 처음에는 루시의 과거와 정신적 트라우마에 집중하게 되지만, 점차 **이 고문이 우연한 사건이 아닌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폭력**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안나가 발견하게 되는 ‘진짜 목적’은 단순한 범죄도 아니고, 사이비 종교도 아닙니다. 그것은 순교자의 눈을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이 고통을 통해 존재 너머를 목격하게 되는 순간을 조직적으로 ‘관찰’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시각적 잔혹함이 아닌, 존재론적 불쾌함

    많은 고어 영화들이 피와 살점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반면, ‘마터스’는 그 장면조차 의미를 부여하여 관객을 더 깊게 무너뜨립니다. 단순히 끔찍한 장면을 통해 쇼크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이 “왜 존재하는가?”, “그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이러한 질문은 관객이 스스로를 방어할 틈도 없이 밀어붙이며, 오히려 **고통을 관찰하는 자신을 자책하게 만듭니다.** 그 순간 관객은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진리를 보려는 시도’를 지켜보는 공범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실제로 마터스는 프렌치 익스트림(프랑스의 과격한 공포영화 흐름)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단순히 잔혹한 장면 때문에 그렇게 분류된 것이 아닙니다. 영화 전체가 인간의 고통, 죽음, 초월, 그리고 신비라는 **존재론적 주제**를 가장 과격한 방식으로 풀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찝찝하고, 더 불쾌하고, 더 강력합니다.

    내성이 생긴 관객조차 무너뜨리는 불쾌감의 전략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익숙해질수록 더 자극적인 영화를 찾게 됩니다. 처음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그다음엔 ‘휴먼센티패드’, ‘서버닌 필름’, ‘그로테스크’, ‘호스텔’ 등을 찾아보며 고통의 끝을 시험하죠. 그러나 그런 영화들의 충격은 주로 시각적이고, 일회성입니다. 반면, 마터스의 충격은 내면을 무너뜨립니다.

    ‘마터스’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무섭다, 혐오스럽다, 충격적이다를 넘어서 **“도대체 왜 이런 영화를 만든 거지?”**라는 철학적인 회의입니다. 이는 단순한 스토리나 장르의 문제를 넘어서, 감정을 건드리는 불쾌감, 윤리적 경계에 대한 도전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잔인함을 오락화하지 않습니다. 폭력적인 장면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거의 없고, 긴장감을 유발하는 전형적인 연출도 최소화되어 있습니다. 이는 관객이 **‘감정적 거리두기’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오히려 그 장면을 그대로, 낯설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관객의 무장을 해제시킵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더 오래 남고, 감정적으로 더 파괴적입니다.

    ‘고통의 끝’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But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마터스’의 마지막 20분은 거의 대사 없이 진행됩니다. 안나는 완전히 무기력해진 상태로 신체의 고통을 초월한 경지에 도달하고, 순교자(martyr)의 경지에 다다른 그녀는 ‘그 너머’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 끝내 밝히지 않습니다.

    단지 그녀의 눈빛과, 그것을 들은 후 관리자가 자살하는 장면만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침묵’이 바로 마터스의 가장 거대한 공포입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은 누구나 궁금해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당신은 듣고 싶겠는가?”라는 불쾌한 질문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이 침묵은 단순한 열린 결말이 아니라, 관객 각자의 세계관, 종교관, 죽음에 대한 인식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끝났을 때 ‘시원함’이 아니라 끝없는 생각과 찝찝함, 그리고 철학적 혼란을 남깁니다.

    결론: 자극에 무뎌진 당신에게, 마터스는 경고다

    ‘마터스’는 자극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새로운 폭력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신체의 폭력이 아니라, 철학적 폭력이며, 존재론적 충격입니다. 어떤 영화는 보고 나면 감탄하게 되지만, ‘마터스’는 보고 나면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왜 이걸 봤지?”, “왜 이 장면이 나에게 이렇게 오래 남는 거지?”, “나는 저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죽음 뒤에 뭔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 질문들은 단지 영화 속 인물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칼날이 됩니다. 그렇기에 ‘마터스’는 쉽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자극에 무뎌진 사람에게는 정신적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하세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당신은 더 이상 예전처럼 영화관을 떠나듯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바로 ‘마터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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