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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사에서 '액션'이라는 장르를 가장 뚜렷하고도 일관된 언어로 풀어낸 감독을 꼽자면, 많은 이들이 류승완 감독을 언급할 것입니다. 그의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는 당시로선 충격적인 방식으로 등장했고, 이후 ‘주먹이 운다’, ‘부당거래’, ‘베테랑’을 거쳐 ‘모가디슈’(2021)에 이르기까지, 그는 매 작품마다 변화하고 도전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뼈대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렇다면, 2000년에 등장한 ‘젊은 패기’의 감독 류승완과 2020년대에 세계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만드는 ‘거장’ 류승완 사이에는 어떤 점들이 달라졌고, 또 어떤 부분은 여전히 동일할까요? 이 글에서는 그의 데뷔작과 최신작을 중심으로 스타일, 주제, 연출 태도, 산업적 포지션까지 다각도로 비교해봅니다.
1.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 거리의 리얼리즘과 액션 본능의 폭발
류승완 감독은 데뷔 당시 “한국의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더 ‘현장적’이고 ‘날것’이었습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3천만 원 남짓한 예산으로, 16mm 필름으로, 본인과 동생 류승범을 주연으로 세운 진짜 인디 영화였습니다.
이 작품은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을 띠며, 무작위적인 폭력과 청춘의 분노, 현실의 모순을 거칠게 내달리는 카메라워크로 포착합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습니다. 내러티브는 파편적이며, 편집은 거칠고, 음악과 대사도 불협화음을 이룹니다. 하지만 그 거침 속에 있는 “날것의 에너지”가야말로 류승완 감독의 초심이자,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정체성입니다.
특히 그가 직접 연기한 '류니버스(Ryuniverse)' 파트는 홍콩 누아르와 한국 현실의 충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류 감독의 영화적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주먹질, 절망, 도망, 무너짐—이 모든 감정들이 90분의 러닝타임 안에 압축되어 관객의 심장을 때립니다. 당시로서는 이 정도의 거친 리얼리즘이 한국 영화의 문법 바깥에 있었기에 더 혁신적이었죠.
2. ‘모가디슈’ (2021): 국제적 감각과 서사적 통찰의 조화
‘모가디슈’는 대한민국 외교 역사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사건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대한민국과 북한의 대사관 직원들이 생존을 위해 협력해 탈출을 감행하는 이야기를 류승완 감독은 장르의 틀 안에서 정교하게 풀어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재난 탈출극이 아닙니다. 냉전의 이데올로기, 정치적 고립, 외교관의 무력함 등 복합적인 주제를 다루되, 전혀 무겁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긴박함’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냅니다.
무엇보다 ‘모가디슈’는 연출의 세련미, 캐릭터 구축의 입체성, 현장감 있는 카메라가 돋보입니다. 류 감독 특유의 액션 감각은 이 작품에서도 살아 있으며, 총격전, 차량 추격신, 군중 속 혼란 등 모든 장면이 철저히 계산된 시네마틱한 질서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데뷔작의 거칠고 즉흥적인 감성에서 벗어난, 장르 마스터로서의 연출력을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또한 ‘모가디슈’는 해외 로케이션(모로코), 고급 장비, 촘촘한 시나리오, 베테랑 배우들로 구성된 블록버스터급 제작 시스템 안에서 류승완이 어떻게 자신의 세계관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끌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3. 무엇이 달라졌나: 현장 vs 시스템, 본능 vs 전략
가장 큰 차이는 ‘제작 방식’과 ‘연출 언어’입니다. 데뷔작은 본능과 충동의 산물이었고, 최신작은 계산과 연출, 프로듀싱이 정교하게 조율된 시스템 결과물입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류승완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만든 영화였다면, ‘모가디슈’는 수십 개의 카메라와 드론, 시뮬레이션이 동원된 국제적 스케일의 액션 영화입니다. 그 사이에 기술적 격차는 물론, 연출자 자신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초기 류승완은 청춘의 분노와 생존 본능을 날것으로 토해냈다면, 최근 류승완은 갈등 구조와 캐릭터 심리를 통해 드라마를 조직적으로 설계합니다. 이는 단순한 진화가 아니라, 사회와 인간에 대한 태도가 더 입체적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4. 무엇이 그대로인가: 폭력의 윤리, 주변부의 시선, 장르에 대한 애정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류승완 감독이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의 영화에서 폭력은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폭력은 시스템에 눌린 청춘의 분노이고, ‘주먹이 운다’의 폭력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며, ‘베테랑’의 폭력은 정의 실현의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모가디슈’에서의 폭력은 이념과 체제를 초월한 생존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주변부에 대한 애정’입니다. 류 감독은 언제나 사회의 중심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그들은 정치인이 아니라 외교관이고, 검사보다는 형사이며, 고위층보다는 노동자에 가깝습니다. 그는 중심의 위선보다 변두리의 진심을 더 선명하게 그려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르에 대한 애정은 단 한 번도 식지 않았습니다. 무협, 액션, 범죄, 정치 드라마, 블랙코미디, 로드무비 등 그는 언제나 장르를 ‘틀’이 아닌 ‘무기’로 사용해왔고,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왔습니다.
결론: 류승완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하나의 장르가 되었나
류승완 감독은 스스로를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영화 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국 영화의 장르적 확장과 사회적 발언을 동시에 실현해온 실천적 연출가로 자리잡았습니다.
데뷔작과 최신작을 비교하면, 그는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는 영화를 만들던 감독에서, 이제는 시스템을 활용해 자신의 철학을 담아내는 거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는 약자의 입장에서 폭력을 말하고, 세상의 모순을 장르 안에 담아내며,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으로도 그의 영화를 기다릴 이유가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류승완이라는 이름은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